지금 왜 이승만을 말해야하나 [동영상 첨부]

이현표 칼럼 | 최종편집 2017.12.26 15: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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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이승만 대통령이 본 한국전쟁

(사진 1: 피란 열차) 남북한의 7500만 우리 민족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북한의 핵개발로 33세의 애송이 김정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촉각을 세우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6.25전쟁이 생각납니다. 우선 현인이 부른 ‘전우야 잘 자라’라는 노래를 들어보겠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공산군이 38선을 넘었습니다. 72세의 스탈린, 57세의 모택동, 그리고 38세의 민족배신자 김일성이 75세의 노인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고,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승만이 서울 시민을 팽개치고 먼저 피란했으며,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고, 피란지에서 ‘국군이 적을 격퇴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방송하여 국민을 기망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제기될만한 비판입니다. 그러나 예나지금이나 이런 비판이 제기되면 황당한 변명이 뒤따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피란을 극구 반대했는데, 주변에서 눈물로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피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웃기는 얘기입니까? 공산군이 서울 시민을 잡기 위해서 내려왔습니까? 이승만을 잡기 위해서 내려온 것 아닙니까? 공산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돌파해서 30분 거리의 서울로 자기를 잡으러오는데, 이승만이 피란하지 않으려고 했다고요? 

그랬다면, 이승만은 공산군에게 잡혀서 처형되고, 대한민국은 적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분은 정말 국가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사진 2: 스탈린과 김일성) 


6.25전쟁에 관한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1) 이승만에게 적(敵)은 공산주의자들의 우두머리인 스탈린이었습니다. 스탈린의 꼭두각시인 김일성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이승만의 그 많은 연설 중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2) 이승만에게 6.25전쟁은 남북한의 전쟁이 아니라,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싸움이요, 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전쟁이었습니다.

 

자, 이제 이승만이 먼저 피란한 이유를 그분의 육성으로 들어보기로 하지요! 6.25전쟁 발발 21일 후인 7월 16일 대국민성명의 일부입니다.  

“이번 전란을 당해서 서울을 떠나 피란하고 국군이 후퇴하여 공산군이 입성한 후에 일부에서 누가 어떤 자리에서 일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민심을 선동합니다. 그러나 (공산군의 침략에 대비해서 미국에 수없이 지원을 요청했지만 받지 못해서 이 지경이 됐는데,) 제갈공명이 국무총리가 되고, 관우와 장비가 총사령관이 되었더라도 어떻게 공산군의 장총과 대포와 전차를 막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사진 3: 이승만 태극기) 7월 16일의 대국민성명 외에도 이승만이 자발적으로 피란길에 올랐다는 증거가 또 있습니다. 대국민성명 닷새 후인 7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망명시절에 사용했던 태극기를 들고 외신기자 앞에 서 있는 사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싸움이 시작됐다. 자유진영의 전초기지인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했으니 도와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적의 포로가 되면 호소조차 해보지 못하고 대한민국이 적화될 것이 알았기 때문에 태극기를 들고 화급히 피란했던 것입니다. 그분에게 태극기는 바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면, 자유와 정의란 이승만에게 무엇이었을까요?

이승만에게 ‘정의’란? 


(사진 4: ‘맹자’) ‘독립정신’은 이승만이 옥중에서 1904년에 집필한 한글로 된 책입니다.
이 책의 핵심은 ‘정의’입니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동양 고전보다는 서양 책을 읽으라고 권장합니다. 동양의 역사와 문화가 서양보다 역사적으로 뒤져서가 아니라, 변화의 흐름을 알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동양 고전 중에서 유일하게 ‘맹자’의 구절만은 인용했습니다. 바로 의(義)에 관한 내용입니다. 

참고로 한자 옳을 ‘의(義)’자는 동물 양을 뜻하는 양(羊)과 나를 의미하는 아(我)를 합한 글자입니다. 아(我)자는 손 수(手)와 창 과(戈)를 합친 것입니다. 따라서 의(義)자는 창을 든 나를 순한 양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도덕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맹자’는 총 7편 261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책입니다. 분량으로 보면, ‘논어’의 세 배나 됩니다. 

‘맹자’의 제1편, 제1장은 양혜왕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맹자에게 묻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에 대해서 맹자는 왕이 어찌 이(利: 이익)에 대해서 얘기하느냐고 반문합니다. 

“만약 국왕이 내 나라의 이익만 생각하면, 장관은 자기 부처 이익만 생각할 것이고, 국민은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같이 사익을 추구하면, 결국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왕은 이(利)가 아니라, 인(仁)과 의(義)를 말해야 합니다.”  맹자는 인과 의를 함께 말했지만, 의(義)에 무게를 두었던 사상가입니다. 반면에 공자는 인(仁)에 무게를 두었구요. 인(仁)이 사람을 사랑하는 개인적인 인간관계라면, 의(義)는 더불어 잘 사는 인간관계, 즉 사회적 정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의(義)가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본사상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맹자’의 제7편인 ‘진심편(盡心篇)’에 등장합니다. 이승만이 ‘독립정신’에서 인용한 것은 바로 이 구절입니다.


(사진 5: ‘독립정신’의 ‘맹자’ 인용) “맹자께서 백성이 중하고, 종사(宗社: 왕실과 국가)가 둘째요, 그 다음에 임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 대의(大義)를 아는 사람은 임금을 겉치레로 섬기지 아니하고 뜻으로 섬겨서, 임금의 명령을 거역해서라도 백성을 이롭게 하고 왕실과 나라를 편안하게 해야만 합니다.”

‘맹자’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성이 가장 중요하며. 사직(社稷: 국가)이 그 다음이고,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제국의 황제가 되고, 황제의 마음을 얻으면 임금이 되며, 임금의 마음을 얻으면 장관이 되는 것이다. 임금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면 갈아치우고,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올렸는데도 가뭄이나 물난리가 나면 제국의 황제도 갈아치운다.” 

이승만은 ‘맹자’의 임금과 황제를 갈아치운다는 혁명적인 구절을 “이 대의(大義)를 아는 사람은 임금을 겉치레로 섬기지 아니하고 뜻으로 섬겨서, 임금의 명령을 거역해서라도 백성을 이롭게 하고 왕실과 국가를 편안하게 해야만 합니다.”라고 온화하게 바꿔놓았습니다. 비록 온화한 표현이지만, 청년 이승만은 맹자의 혁명적인 사상에 심취했던 것입니다.  

잠시 부연하자면, 맹자는 의(義) 사상을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의미의 ‘여민락(與民樂)’ 사상으로 설명합니다.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갔을 때, 왕은 호화롭게 조성된 연못가에서 새와 짐승들을 바라보며, 누가 이런 즐거움을 가질 수 있냐는 듯이 자랑스럽게 맹자에게 묻습니다. 

“현자도 이런 것들을 즐기나요?” 

그러자 맹자는 이렇게 쏘아붙입니다. 

“현자라야만 이런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현자가 아니면 비록 이런 것들을 가졌더라도 즐길 수 없습니다.”

맹자는 임금이 혼자 즐기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며, 백성과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는 ‘여민락’ 사상을 설파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신하든 국민이든 의리를 갖고 임금을 섬기며, 사회정의가 바로 선다고 양혜왕에게 충고한 것입니다. 

이승만에게 정의는 맹자가 말하는 ‘의(義)’였습니다. ‘의(義)’는 서양인들이 말하는 정의(Justice)와 상통합니다. 

이승만이 12세부터 과거에 응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흔히 그가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한 이유를 과거제도의 부정부패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맹자의 ‘의(義)’ 사상에 빠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우리 민족의 ‘맹자’입니다. 둘을 꼼꼼히 읽다보면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비유를 통해서 위정자들의 정의롭지 못한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정의로운 삶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승만과 맹자의 사상을 함께 다룬 책과 논문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이승만 박사와 맹자를 심층적으로 비교하는 연구가 필요할 때입니다.    

잠시 윤복희가 부르는 여민락의 노래를 들어보시지요!


(윤복희 ‘우리는 하나’)

이승만에게 ‘자유’란?    


(사진 6: 배재학당 현판) ‘맹자’를 통해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이승만은 서양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1895년 5월 배재학당에 입학합니다. 그해 말 귀국한 서재필은 1896년 5월부터 배재학당에서 세계지리⋅역사⋅정치학을 가르쳤습니다. 이승만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배재학당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입학했는데, 영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배웠다. 그것은 ‘정치적 자유’라는 사상이었는데, 너무나 혁명적인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그 같은 정치적 원칙을 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문인(文人)의 풍모를 타고 났습니다. 신장도 크지 않았으며, 생김새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맹자’의 의(義)는 이승만을 정의의 제단에 몸을 바칠 혁명가로 만들었고, 서구의 ‘정치적 자유’ 사상은 그를 어느 군인도 감히 흉내 못 낼 배짱과 승부욕을 발휘하는 지휘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칼과 총으로 무장하고 싸우는 지휘관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로 무장하고 싸우는 혁명의 지휘관이었습니다. 

1897년 7월 8일, 서울 장안의 화제는 장차 조선을 이끌어 나갈 배재학당 학생들의 졸업식이었습니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이승만의 영어 연설이었습니다. 졸업생 대표인 그는 ‘조선의 독립’이란 주제로 연설했습니다. 그 핵심은 조선의 독립은 자유와 정의가 보장되는 진정한 것이어야 하고, 지속적이며, 영원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이 미국처럼 자유민주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꿈을 가졌던 청년이었습니다.  



(사진 7: 패트릭 헨리) 이승만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는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의 명언을 종종 인용했습니다. 이 구절은 패트릭 헨리가 1775년에 행한 미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연설의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패트릭 헨리가 말한 ‘liberty’는 ‘freedom’과 차이가 있습니다. ‘freedom’이 개인적인 자유라면, ‘liberty’는 사회적인 합의 과정을 거쳐서 보장된 자유를 말합니다.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위대한 인물은 언제나 악인이다.”라는 존 액턴(John Acton)의 명언은 많이 인용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에 관해서도 불멸의 명언을 남겼습니다.  

“자유(liberty)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힘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다.”

“Liberty is not the power of doing what we like, 

but the right of being able to do what we ought.”


   

(사진 8: 이승만의 명언) 이승만이 말한 자유는 패트릭 헨리나 존 액턴처럼 ‘freedom’이 아닌 ‘liberty’였습니다. 이승만은 말합니다.

“자유의 권리만 알고 자유의 한계를 알지 못하면, 

자유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 


“자유를 즐기는 사람은 많아도 

자유를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이승만은 자유가 국민이 지녀야할 최고의 덕목의 하나지만, 정의를 위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한편, 이승만은 그의 저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실체)에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명언을 소개하면서, 미국의 성조기를 다음과 설명합니다. 

“성조기는 미국의 고귀한 자유를 수호하는 상징입니다.” 

“The Stars and Stripes stand for the protection of 

this land of the noble free.“

‘liberty’를 ‘the noble free’라고 표현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성조기를 ‘고귀한 자유를 수호하는 상징’이라고 말한 것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이는 이승만이 태극기를 한민족의 정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상징으로 인식하고 살았던 선각자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사진 9: 트럼프) 미국은 매년 6월 14일을 ‘국기의 날’로 기념합니다. 1777년부터의 전통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가 1946년 ‘국기에 날’에 태어났다는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성조기는 나와 미국인, 전 세계인에게 정의, 평화, 희망의 상징이다. 또한 위대한 용기와 희생의 표상이기도 하다.”

국기에 대해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사랑하는 것과 맹목적으로 국기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정의로 무장한 이승만의 투쟁

(사진 10: 옥중의 이승만) 맹자에게 ‘정의’ 사상을 배우고, 배재학당에서 ‘자유’를 배운 청년 이승만은 우리나라에 미국식 민주주의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전파하는 활동에 뛰어듭니다. 

이승만은 1898년 1월 순한글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를 만들고, 그해 4월에는 순한글 일간지인 ‘매일신문’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해 8월에는 ‘뎨국신문’을 창간하고 주필로 활약했습니다. 이승만은 옥중에서도 27개월이나 ‘제국신문’에 기사를 썼습니다. 

또한 대중집회에서 자유와 정의에 반하는 탐관오리의 비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는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혁명적이고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1899년 1월 황제폐위 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탈출하다가 실패했습니다. 동료 최정식은 사형, 이승만은 평생 후유증을 갖고 살아야 했던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5년 7개월간 수감되었다가 1904년 8월 출소했습니다.

혹자는 이승만이 이런 극한상황에서 기독교에 귀의했음을 강조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것은 그가 감옥에서 태극기로 무장한 혁명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독립정신’의 서문에는 혁명가 이승만의 출옥 후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 방향이 천명되었습니다.

“무릇 우리나라에서 중등(中等) 이상 사람이나 어느 정도 한문을 안다는 사람은 거의 다 썩고 물이 들어서 바랄 것이 없다. 그들 주변 사람도 다 그 기운을 받아 마찬가지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식하고 천하며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이 책을 읽고 기운이 솟아, 책에서 얻은 바를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인심이 아래로부터 변해서 썩은 데서 싹이 나고 죽은 데서 살아나기 바란다.” 

‘독립정신’에서 이승만은 미국, 프랑스 등의 나라에서는 백성이 정부를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관리들은 백성을 주인처럼 섬기고 보호하며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민초들에게 자기 권리를 알고 보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이승만은 민초들에게 후세의 행복을 위해서 목숨을 던질 각오로 자유와 정의의 상징인 태극기를 지켜야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국기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국기를 수호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던져 국민과 영토와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나라는 태평하고 안락한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극기를 사랑하지 못해서 이렇게 원한이 맺히게 되었으니, 변변치 못한 목숨을 태극기를 수호하는데 귀중하게 내던져서 후손들이 즐거운 세상을 보게 함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의리이니,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 2천만 동포 중 1천9백9십9만9천9백9십9명 모두가 머리를 숙이거나 살해된 후라도, 나 하나는 태극기를 받들어 머리를 높이 들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맹세합시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이승만은 1904년 8월 출옥합니다. 그리고 11월 미국으로 떠납니다. 1905년부터 그는 미국 언론과 정치인을 대상으로 일제의 한국침략을 성토합니다. 또한 학업에 열중하여, 조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5년 만에 끝냅니다. 

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 대학에서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는데, 그로부터 한 달 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서 합병됩니다. 1910년 10월 10일 귀국한 이승만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하지만,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912년 3월 다시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사진 11. 미국 민주당 유세장) 1912년 6월 19일,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의 은사인 우드로 윌슨을 만나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당시 윌슨은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거유세에 한창이던 때입니다.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로 노벨상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정치학에서 행정학을 분리시켜서 행정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사진 12: 미국 민주당 선물용 손수건) 선거 유세에서 윌슨은 50개국 국기로 디자인 된 손수건을 선물로 활용했는데, 여기에 태극기도 포함됐습니다. 이는 이승만이 윌슨에게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선거유세를 지원했다는 증표입니다. 윌슨은 1913년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1921년 퇴임했습니다.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한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태평양잡지’ 등의 정기간행물을 창간해서 동포들을 대상으로 시사정보를 제공하고, 조국의 독립과 자유와 정의의 중요성을 고취시켰습니다. 

1920년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고, 1945년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1) 미국 및 세계 언론과의 인터뷰, 2) 국제회의 참석, 3) 외국의 정치인 등 여론주도층 인사 면담들을 통해서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했습니다. 

해방 정국의 이승만 


(사진 13: 이승만 대통령 취임연설) 광복 이후 한반도에는 심각한 이념갈등이 조성되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북한에서 스탈린을 “약소민족 해방의 위대한 은인”이라고 찬양하고, 스탈린의 간택을 받은 김일성을 대단한 항일투쟁가로 선전한데서 비롯됐습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김일성은 이승만보다 한 달 전인 9월 19일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은 전체주의국가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대항해서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자유민주국가의 꿈을 설파했습니다. 그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간의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에 반대했으며,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이를 관철시켰습니다. 만일 그때 이승만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였다면, 6.25전쟁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한반도는 공산화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반만년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직접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실시됐습니다. 선거 결과 198명의 제헌의원이 선출되고 5월 31일 제헌의회가 소집되고, 이승만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됐습니다. 

6월 초 제헌헌법 초안이 제출됐는데, 유진오가 중심이 돼 만든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법학자로 활동했던 그는 1889년 공포된 일본제국헌법과 1946년 11월 공포된 일본국헌법에 익숙했습니다. 따라서 헌법 초안은 일본식의 내각제였으나, 정치적 이상향이 미국식 민주주의였던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주장해서 관철시켰습니다. 

내각제 요소가 많이 가미된 대통령제 제헌헌법이 1948년 7월 17일 반포되고, 7월 20일 국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국회가 대통령을 뽑는 제도는 6.25전쟁 중에 헌법 개정에 의해서 국민이 뽑는 제도로 바뀌었습니다.   제헌헌법에는 사회정의의 실현을 기본으로 삼고, 자유는 그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승만이 평생 지녔던 정의와 자유의 신념이 반영된 것입니다. 반면에 1987년 개정된 현행헌법에는 사회정의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자유라는 기본원칙으로 강조되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눈부신 정치⋅경제적 발전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승만이 꿈꾸었던 자유와 정의 나라에서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승만의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을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을 누구보다 존경했던 위대한 음악가 한분의 삶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윤용하와 이승만

(사진 14: 윤용하) 사진을 보시지요. 저는 6.25전쟁과 관련해서 가장 인상적인 사진을 꼽으라면, 이승만 대통령이 피란지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는 사진과, 여기 보시는 태극기 앞에 서 있는 인물 사진을 꼽을 것입니다.  


이분은 우리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입니다. 그는 이승만처럼 황해도 출신입니다. 1922년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이 학력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음악 천재였던 그는 만주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여, 해방 전에 벌써 어엿한 지휘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1945년 초, 윤용하는 일제에 의해서 징집되어 훈련을 받던 중에 탈출했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함경도에서 음악교사를 하다가 공산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1946년 여름, 자유를 찾아서 월남했습니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광복절 노래’(작사: 정인보)를 작곡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애국가’, ‘3.1절 노래’, ‘현충일 노래’, ‘제헌절 노래’ 등 많은 의식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광복절 노래야말로 가사와 멜로디가 가장 잘 어우러지는 걸작입니다. 노래를 감상해보시지요.

윤용하는 6.25전쟁 전쟁 기간 중에 가장 바빴던 예술가였습니다. 부산에서 어린이음악원을 만들어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전시동요를 만들어 보급했고, 종군음악가로 전선을 순회하면서 많은 군가를 작곡해서 군의 사기를 높이는데 기여했습니다.
 


(사진 15: 이승만과 윤용하) 윤용하는 누구보다도 이승만 박사를 존경했으며, ‘우리 대통령’이라는 곡도 만들어 헌정했던 분입니다. 또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사진은 1959년 이승만 대통령과 반공예술인들이 경무대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맨 끝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윤용하입니다. 

간암으로 시한부 생명을 살던 윤용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가 하와이에서 김포공항에 도착하던 1965년 7월 23일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전셋집 뜰에서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은 후 그날 밤 43세로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윤용하는 천재 음악가이면서도 평생 자기 집 한 채는커녕, 피아노 한 대도 가져보지 못한 의로운 분이었습니다. 1958년 3.1절 기념식 후, 예술인들이 시민회관에서 자축파티를 열었을 때입니다. 예술계 원로들이 일본말로 떠들자, 윤용하는 술과 음식이 놓인 탁자를 뒤집어엎어버렸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의로웠고 자유를 찾아 남하했던 윤용하는 이 땅에 발붙일 기반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결국 가난에 허덕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남긴 동요, 국민가요, 가곡, 군가 등 100여곡은 하나 같이 나라 사랑의 노래입니다. 윤용하의 작품들이 이승만과 관련된 행사에서 널리 연주되기를 기원해봅니다.

이승만 대통령 추모 노래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이 낳은 전무후무한 정치인입니다. 그분은 자유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단군 이래 지속돼온 세습왕조 정치를 송두리째 무너뜨린 혁명가이기 때문입니다. 

동포를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에서 살도록 하겠다는 그분의 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은 한반도의 남쪽에서만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투쟁은 반만년 우리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난 지 52년이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천국에서 우리에게 슬퍼하지 말고, 저 북쪽 땅에도 자유와 정의가 넘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계십니다. 

그분의 메시지를 영국 가수 로빈 깁(Robin Gibb)의 입을 빌려서 들어보겠습니다. 영국 록그룹 비지스(Bee Gees)의 메인 보컬 로빈 깁은 2012년 5월 20일 사망했습니다. 그가 남긴 최후작품은 2012년 4월 발매된 타이타닉호 침몰 100주기를 추모하는 클래식 음악앨범, ‘타이타닉 진혼곡’(The Titanic Requiem)입니다. 

   

이 앨범의 압권은 로빈 깁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병상에서 녹음한 ‘홀로 울지 말라’(Don’t Cry Alone)라는 노래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에게 주는 슬프고도 고무적인 메시지로 생각하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Don't cry alone

홀로 울지 말라

 

If your heart is breaking
I’m yours whatever
 I will not forsake you ever
 Don’t cry alone.

네 가슴이 미어진다면,

내가 어떻게든 네 곁에 있겠다.

난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홀로 울지 말라.

 Through the autumn rainfalls
 I’ll be your shoulder
If the winds of love grow colder

Don’t cry alone.

가을 빗줄기 속에서

널 내 어깨에 기댈 수 있도록 해주마.

사랑의 바람이 차가워진다고
홀로 울지 말라. 

Surely as the sun sets
New suns are rising
As winter heralds spring’s horizon
Don’t cry alone.

해가 지면 분명히 

새로운 태양이 솟고,

겨울은 봄의 조짐을 알리는 법이다.

그러니 홀로 울지 말라.

 Don’t you ever doubt me 

you lead, I will follow
Sweep away all pain and sorrow
Don’t cry alone.
 No, don’t cry alone.

의심하지 말라. 

네가 앞서고 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모든 고통과 슬픔을 쓸어버려라.

홀로 울지 말라.

절대 홀로 울지 말라.

 No, don’t you ever doubt me
 I’ll be there for you forever
Don’t you ever cry

절대 나를 의심하지 말라.

영원히 네 곁에 있을 테니.
넌, 절대 울어선 안 돼.

 I’ll sweep away your tears and sorrow
And I’ll be with you close tomorrow
I’ll be with you Don’t cry alone
 I’m Yours Don’t cry alone.

난 네 눈물과 슬픔을 씻어줄 거야.

또한 내일 네 곁에 가까이 있을게.

너와 함께 있을 테니.

울지 말라.

너와 함께 할 테니.

홀로 울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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